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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그 찬란한 역사 속을 걷다
도심에 또 하나의 숲속 창경궁을 찾아
2011년 01월 26일 (수) 07:11:23 조경렬 기자 press2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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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궐의 정전인 명정전 바로 왼쪽 건축물이 문정전이다. 창경궁의 편전으로 평상시 임금이 정사를 보던 곳이다. 일제 때 없어진 것을 1986년에 복원했다.
창경궁을 관람하기 위해 입궁하는 코스는 두 군데다. 하나는 정문인 홍화문으로 입장하는 코스와 또 하나는 창덕궁에서 연계 관란코스로 연결되어 있다. 예전에는 종묘에서 연결되는 구름다리를 이용해 입장하는 코스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했다.

외국인 관람객들은 두 곳을 동시에 관람하는 경우가 많다. 답사팀은 서울대 의대쪽에 있는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을 통해 입궁했다. 연초부터 날씨가 연일 영하 10도 이하로 추운 겨울날씨라서 구런지 외국인 관광객과 일부 학생들이 오갈 뿐 한산했다.

昌慶宮의 본래 명칭은 수강궁이었다. 1418년 세종대왕이 즉위하자 생존한 상왕인 태종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지었다. 그 후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성종15년(1484) 명정전과 문정전, 통명전 등 궁궐을 크게 지으면서 창경궁으로 고쳤다.

   
 
이 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화재가 나 소실한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복구 했으나, 순조 30년(1830)에 또 큰 화재가 나 많은 궁궐건물을 잃고 순조 34년(1834)에 대부분 다시 지었으나 정전인 명정전은 광해군 때 중건된 이래 원형대로 보존되어 조선 왕궁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창경궁은 순종 3년(1909)에 동.식물원을 개설하고 일반인에게 관람케 했으나 1911년 일제가 궁내에 박물관을 설치하고 '창경원'으로 격을 낮췄다. 그 후 동물원을 지금의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1983년 12월부터 3년간에 걸쳐 정부의 민족문화계승 사업의 일환으로 일제가 변형시킨 창경궁을 왕궁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답사의 순서는 궁을 이해하기 쉽도록 정문인 홍화문을 출발하여 정전인 명정전에 이르는 코스로 했다.    

   
 
홍화문弘化門

홍화문(보물 384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건축물이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보수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으로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했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해 준다. 여러 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귀중한 연구 자료다.

   
 
옥천교玉川橋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옥류천을 가로 질러 돌다리인 옥천교(보물 386호)가 있는데, 이 곳은 산천의 정기를 옮겨다 주는 명당수가 흐른다. 전체적인 형태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 2개를 이어 붙여 안정감이 있고, 궁궐의 다리에 맞는 격식을 갖췄다.

홍예가 이어지는 공간에는 억센 표정을 하고 있는 도깨비 얼굴을 새겨놓아 주의를 끄는데, 공간에 맞추려는 듯 이마가 넓고 턱이 좁아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다리 위는 중간부분이 무지개처럼 약간 둥그스름하며, 다리의 너비는 널찍한데, 이는 임금님이 거동할 때 좌우를 옹위하는 의장대 행렬까지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다리의 좌우로는 아름다운 난간을 세우고 양 끝의 기둥 위에는 돌짐승을 둥글게 조각했다. 궁궐 안의 다리인 만큼 각 부분의 양식과 조각이 특별하며, 특히 다른 궁궐의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 이 다리만이 보물로 지정됐다. 만들어진 시기는 창경궁을 짓던 때와 연관 지어 조선 성종 14년(1483)인 것으로 보인다.

   
 
명정문과 행각

옥천교를 지나면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보물 385호)이 있다. 이 명정문을 들어서야만 정전에 이르게 되는데, 그 주변에는 사각으로 행각이 둘러싸여 있다. 이 문은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세울 때에 지은 것이지만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광해군 때 다시 지었다.

회랑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시대 때 철거 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인데, 2칸 규모로 기둥 윗부분에 새부리 모양으로 뻗어 나온 장식을 했다. 명정문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조선시대 특징인 팔작지붕에 기둥구조는 다포식이다.

건물 안쪽은 천장의 뼈대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일부는 천장 속을 가리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의 짜임이 착실하고 알차서 조선 중기의 문을 대표할 만하고 짜임새가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궁궐 중문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명정전明政殿

명정문을 들어서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창경궁의 정전으로 웅장한 명정전이 눈에 들어온다. 명정전(국보 226호)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던 장소로 사용됐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했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건축물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1층 건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궁궐의 정전으로서는 작은 규모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으로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또 기둥 위의 장식적인 짜임은 그 짜임새가 매우 견실하며, 그 형태가 힘차고 균형이 잡혀 있어 조선 전기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왕이 앉는 의자 뒤로 해와 달, 5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건물 계단 앞에는 신하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24개의 품계석이 있다. 명정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지만,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명정전 바로 좌측 건축물이 문정전인데, 창경궁의 편전으로 평상시 임금이 정사를 보던 곳이다. 일제 때 없어진 것을 1986년에 복원했다. 또 숭문당은 경종(1721~24)때 세운 것인데 순조 30년(1830)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숭문당 현판과 '일감재자'라는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정전 뒤로 나서면 아담하게 함인정이 서 있다. 이곳에는 본래 성종15년(1484)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선조25년(1592) 임진란 때 불탄 뒤 인조가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곳으로 옮겨 세우면서 함인정이라 했다. 그 후 다시 소실한 것을 순조33년(1833년)에 지어 오늘에 이른다.

   
 
통명전通明殿
 
함인정 바로 뒤에는 환경전이 있고, 그 위쪽으로는 경춘전이 숲속에 묻혀있다. 이 경춘전에서 오른쪽으로 웅장한 통명전(보물 818호)이 나무 숲 사이로 고고함을 뽐내고 서 있다. 이 통명전은 창경궁 안에 있는 왕의 생활공간으로 연회 장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처음 지었던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때 고쳐 지었으나, 정조 14년(1790) 다시 화재로 소실됐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4년(1834) 창경궁을 고쳐 세울 때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7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이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뻗쳐 나온 재료 구성이 조선 중기 양식의 특징과 정결한 건물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건물 왼쪽으로 돌난간을 만들어 놓은 연못과 둥근 화강석을 두른 샘, 건물 뒤쪽에 꾸민 정원이 한층 더 고고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궁궐 안 내전 중 가장 큰 건물로 옛 격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세기 건축 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문화재다. 바로 옆에는 양화당이 있고, 영춘헌, 풍기대 등이 연이어 숲 속에 묻혀 있다. 또 그 뒤쪽으로는 성종태실비가 있으며, 그 옆으로 춘당지가 있는데, 사계절 아름다운 연못의 풍광을 자아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매우 좋은 곳이다.

관천대觀天臺
 
궁궐 안의 천문관측소인 관천대(보물851호)는 종묘쪽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서울에는 현재 조선시대에 만든 2개의 관천대가 있는데, 하나는 창경궁 안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옛 북부 관상감 자리인 전 휘문고 교지에 있다. 이 두 관천대는 구조나 크기, 제작 방법이 거의 같다. 창경궁 안에 있는 이 천문 관측소는 <서운관지(書雲觀志)>에 의하면 조선 숙종 14년(1688)에 만들어졌다.

높이 3m, 가로 2.9m, 세로 2.3m 정도의 화강암 석대 위에 조선시대 기본적인 천체관측 기기의 하나인 간의를 설치하고 천체의 위치를 관측했다. 지금은 간의는 없고 석대만 남아 있는데, 당시에는 관측소를 소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도 불렀다. 17세기의 천문 관측대로서는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창경궁내팔각7층석탑
 
창경궁팔각7층석탑(보물1119호)은 약 536년 전 석탑으로 창경궁 안의 연못 옆에 조성된 탑으로, 8각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이다. 기단부는 3단의 바닥돌 위로 높직한 1단의 기단이 올려진 모습인데, 각 면마다 조각으로 가득 차 있다.바닥돌은 4각으로 밑단을 두고 그 위로 2단의 8각 바닥돌을 조성했는데, 8각의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다.

기단과 닿는 곳에는 1단의 연꽃받침을 놓았으며, 기단은 각 면마다 꽃무늬를 새겼다. 7층에 이르는 탑신의 1층 몸돌은 높고 볼록한 모습으로 2층부터 낮아지며, 지붕돌은 목조건축의 지붕처럼 기왓골이 표시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후대에 보충한 듯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1층 몸돌에는 탑을 세운 연대가 새겨져 있어, 조선 성종 원년(1470)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밖에도 통명전 뒤로 돌아가면 세종태실이 모셔져 있고, 아름다운 춘당지 양 옆으로 난 오솔길은 참 걷기 좋은 숲길로 서울 도심에 이런 숲이 있나 싶을 정도다. 이렇게 해서 사적 123호인 창경궁을 답사해 봤는데 현재 식물원은 춘당지 위쪽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못 주변의 고목들은 고궁의 고졸한 맛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조경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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